2024.03.25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프로그램은 영어를 처음 접하거나 아직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과정이다. 학교나 사설 교육기관에서 제공하는 영어 교육으로 지금은 미국 전역에 보편화되어 있지만 필자가 처음으로 ESL을 들었던 25여년 전만 해도 한 카운티(County)에서 한 개의 지정된 고등학교에서만 운영될 정도로 ‘제2국어로서의 영어'교육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ESL 클래스는 한 학교에 오직 한 반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기에 각기 다른 레벨의 영어 실력을 갖춘 학생들이 한 장소에 모여 수업을 듣고는 했다. 지금은 중요 과목별로 ESL 선생님을 배정하는 공, 사립 학교들이 있을 정도로 레벨 세분화가 잘돼있지만 국제 학교와 같이 규모가 작은 학교에서는 여전히 한 명의 선생님이 각기 다른 레벨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반에서 수업을 진행하며 예전과 같은 애로사항을 겪고 있다.


여느 과목과 마찬가지로 각 학생의 실력과 현주소에 따라 수업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자이건 후자이건 ESL 학생이 원어민 학생과 실력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본인이 뒤처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좌절할 필요도 없고 ESL 수업이 너무 쉽다고 생각하여 자만을 해서도 안된다. 쉽게 말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의 실력을 놓고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마치 도토리 키재기와 같은 큰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영어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구몬 학습지를 하면서였다. 알파벳을 배우고 기초단어를 반복하며 쓰고 읽은 기억이 난다. 영단어 몇 자만 익혀가며 6학년 말,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학원에서 영어 문법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 3년 내내 객관식 위주의 영문법 베이스 시험을 치며 영어라는 언어를 조금씩 알게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을 때 중학교에서 배운 문법이 도움이 되었는지 ESL 수업은 내게 너무나도 쉬운 과목이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한 학년 유급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울 게 없다고 느꼈던 나는 ESL을 한 학기만 듣고 곧바로 9학년 English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정규 영어 수업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매 학기 끝내야 했던 Research Paper는 엉망진창인 내 Writing 실력으로 전전긍긍했어야 했고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Reading 조차 너무 버거워서 필독서나 Textbook에 실린 Short Story를 다 읽지도 못한 채 과제를 해간 적이 다반사였다.


책 내용의 줄거리와 해설을 정리해 놓은 Sparknote의 힘도 빌려 봤지만 그마저도 읽고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결과 생존만이 목표가 된 나의 학업은 배움과 성장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실리 없는 졸업장 종이 쪼가리만 남겨 주었다. 그나마 이과 계열 과목은 비교적 수월했기에 진로 역시 자연스레 이공계로 정했고 대학을 입학하게 되었다.


다시 돌이켜봐도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날들이다.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건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건지, 어른들은 왜 그렇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적어도 대학에 가고 졸업해서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내적 욕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 시절을 버텨낸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결국 ESL을 조기 졸업하고 적어도 transcript에 낙제라는 낙인을 면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이유를 들자면 그건 바로 영어의 기초인 문법을 탄탄하게 다져왔기에 가능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특히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면 더욱이 기초를 다지는 것이 어려워진다. 넘쳐나는 학교 숙제와 남들에 비해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의 뇌를 잠식하는 순간 조급함과 혼란이 생겨나고 자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많은 생각이 들 것이다.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는데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말도 안 통하는데 친구는 잘 사귈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졸업은 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수많은 불안한 생각과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만 한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걱정과 지금 당장 직시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후 먼저 상황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존감은 낮아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내적 갈등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더욱이 힘들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한 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강구를 해나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어가 편해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말은 쉽지..”라고 생각하며 현실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올바른 방법과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올바른 마음가짐은 이미 언급했듯이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세, 그리고 앞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전진해 나가겠다는 결심이면 충분하다.


그럼 올바른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강조하지만 그건 바로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기초는 단발성 훈련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 바로 기초이다. 단순히 문법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방법으로 문장을 읽고 쓰는데 활용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어의 진수를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읽고 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어 암기를 통한 높은 어휘력을 꼽겠지만 필자는 단연코 문장의 전체 구조를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생각해 낼 줄 아는 Sentence Processing(문장 처리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ESL 학생들은 영어를 제2국어로써 접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바로 직독직해를 해내기 어렵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내어 문장을 읽어도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에는 구조, 즉 문장의 전체 틀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구조를 보지 못한다는 말은 곧 각 문법 개념의 용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원어민이 아닌 이상, 어떤 언어를 배우든지 단 한 문장도 대충 해석하면 안 된다. 해당 문장에 쓰이는 문법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유사한 구조를 또다시 접할 때 순조롭게 읽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읽어야 했던 필독서였는지 그냥 혼자 읽어보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Crime and Punishment 또는 Frankenstein이었던 듯하다)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침대에 누워 그 책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막혀 버렸다는 것이다. 두꺼운 사전을 뒤져가며 그 문장에서 있는 모르는 단어를 죄다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의미를 유추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동일한 문장을 스무 번이나 넘게 읽고 나서야 드디어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문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각 단어, 구, 절의 관계를 문맥에 들어맞을 때까지 연관 짓고 그 의미를 파악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비록 그 한 문장에 소요한 시간이 원어민 학생이 읽고 process 하는 시간의 몇십 배는 더 걸렸을지라도 그때 내가 얻은 문법의 활용 기법은 나에게 너무나 큰 자산이 되었고 지금까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동일한 방법으로 각 문장의 구조를 파악하는 연습을 머릿속에서 수만 번 해온 결과 지금은 어떠한 문장이든 단 몇 초 만에 처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구조를 모르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결국 도달하려는 목적지까지 희미해져 버리기 일쑤다. 비단 ESL 학생뿐만 아니라, 한 언어를 제2국어로 배우려는 모든 이들에게 조언을 주자면 ‘먼저 구조를 볼 줄 아는 시력을 키워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구조를 볼 줄 알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나머지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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